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기타 == * [[파일:external/www.saegeoje.com/193770_11632_157.jpg]] [[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 옥계 마을에 칠천량 해전 [[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름만 보면 원균 기념 시설로 오해할지도 모르나, [[https://www.gmdc.co.kr/_chilcheonryang/_sub01/sub01_01_01.html|사이트]] 문구부터가 '''아픈 역사를 발판삼은 다크투어리즘의 명소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즉, 어두운 역사를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가 크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기문포 해전 등의 통제사가 된 원균의 실책이나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정작 칠천량 해전 자체는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통념에 가까운 내용으로 소개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문서의 2번 부분까지는 이 전시관에서도 잘 다루었지만, 3번 부분의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궤멸당했다는 통념에 가까운 구성이며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을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다. * 반대로 [[평택시]]에 위치한 원릉군기념관에는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출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칠천량 해전공원과 달리 원릉군기념관은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가 [[원균옹호론|원균 재평가]]를 노리고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원균]]은 잘못 없고 패전은 조정 탓'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원균이 수륙병진을 주장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조정이 압박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전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순신이 건재할 때는 수군만으로도 된다고 주장한 건 원균이었다.] * 조선에게는 그야말로 쓰디쓴 참패다. 후대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지만 사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혹한 패전이었다. 후대에 덧붙이기로 [[원균옹호론]]이나 재평가, [[판옥선]]의 성능이 왜선을 압도, 부관들의 역량도 뛰어나기에 이순신이 잘했다기보다는 승리가 당연 등의 기묘한 평가가 반박된다는 점이 있다고는 한다. 이순신의 유능함이나 원균의 놀라운 무능함 등은 나무위키의 여러 관련문서에서 많이 서술되어 있고 이 해전은 원균의 무능력함으로 그 둘의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지기는 한다. 역사를 이런 인물간의 관계성이나 스토리로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보편적이고 재미도 뛰어난 것은 맞지만, 아무리 원균이었어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뼈가 아픈 대참사였다.[* 애초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는 커녕 경상우수사에도 부적합했다.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전사해도 모자랐을 사람이겠지만 천운인지 이순신을 만나서 그래도 살아남고 전투에서도 활약할 기회 정도는 있었을 것이고 자기 주제를 안다면 거기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도 넘는 만행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주제도 모르는 선택을 했다. 칠천량 해전 전까지 원균에 대해서 이순신을 옹호하던 이들도 용감하다 정도로는 평가했으니 그냥저냥 지냈다면 살아서는 공신이요 승장으로 대접받으며 잘먹고 잘살다 갔을 것이며 후세에는 안좋은 행적이 드러나 욕은 먹겠지만 그냥저냥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용장 정도로는 기억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본인 목숨은 날아간건 물론이요 조선의 희망을 반 박살을 내버려 후세에까지 길이길이 남을 똥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의 중요성~~] 상술된 기묘한 평가들이 반박되는 적절한 사례라는 것에 그나마 의의가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 참혹함에서 도피하고자 그런 인물론이나 스토리성의 시각으로 빠지는 무의미한 위로행위나 정신승리에 가까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사실상 칠천량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큰 이득은 만악의 근원인 '''원균이 사라진 것 그 자체''' 정도다.[* 그러나 원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재앙의 장본인인 이유가 가장 크기 때문에...] 만일 원균이 살아있었다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다면, 역설적이게도 도요토미 정권이 실제 역사만큼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여 정유재란이 확전된 것이 이후의 [[명량 해전]]과 [[직산 전투]]를 기점으로 일본군이 다시 밀리게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도요토미 정권의 엄청난 타격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여 정유재란이 국지전 정도로 끝났다면, 도요토미 정권이 입는 타격 또한 실제보다 줄어들어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쿠데타에 대비할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을 것이다. [[분류:임진왜란/해전]][[분류:1598년 전투]][[분류:토도 타카토라]][[분류:원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